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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나리스

작성일 2006.01.23 ㅣ 본사람 10685 | 사용도구 photoshop / /

‘파나리스 의식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재훈은 한적한 길모퉁이에 붙은 포스터를 한 시간째 쳐다보고 있다. 그 문구와 전화번호 하나를 제외하고 포스터에 적힌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은 보통의 포스터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포스터가 붙여질 만한 벽이 아닌 외진 곳에, 그것도 단 한 장만이 붙여져 있다는 점이 좀 특이했다. 종이의 크기가 작은 건 아니어서 눈에 띄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데다 붙여놓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게다가 수상한 것은 그 단어였다. 파나리스. 우주인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걸 주장하는 신흥 종교 운동의 이름 같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잡고 ‘도’를 아냐고 묻는 이들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는 단어였다. 그것도 아니면 새로 나올 아이스크림의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기도, 펴기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서 한 모금을 내뿜기도 하면서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 재훈이 결심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그였지만, 이 이상한 포스터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012-243-7710.
“여보세요?” 극히 평범한 젊은 남자였다.
“네.. 저.. 저기 포스터를 보고..” “네?” “그.. 파나리스 의식이라는..” “무슨 소린지 잘 안들리거든요? 전화 잘못 거셨네요.” 뚝-. 순간적으로 재훈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싱거운 장난에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분했다. 씁. 홧김에 포스터를 찢으려던 그는 어쩐지 혼자서만 당하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스터는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탁재훈씨. 틀렸습니다.” 익숙한 TV 프로그램이 오늘따라 흥미롭지 않았다. 화면 속 인간들은 마치 지금 당장 운석이 그들 뒤에 떨어진대도 상관없다는 식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쯧…”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재훈은 손을 뻗어 TV를 껐다. 바로 누워 천정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널찍하지도, 좁지도 않은 재훈의 오피스텔에서 침실과 부엌 사이는 몇 걸음 되지 않았다. 순간 재훈은 온 몸의 털이 하나도 빠짐없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그의 귀는 좀 더 많은 소리를 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하리.. 마스.. 티리스노..” 사람의 소리 같지는 않았다. 책상 위의 커터 칼을 슬며시 집어 들었다. 하필 커터 칼이라니. 재빨리 방문을 열며 그는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부엌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잠시 전에 라면을 끓여먹고 남은 설거지 거리들만 싱크대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천장의 형광등도, 윙윙거리는 작은 냉장고도, 거무칙칙한 가스 레인지도 모두 그대로였다. 왠지 다행이라는 기분과 함께,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그의 방 쪽에서 다시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 피리디.. 아노이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쪽으로 재훈은 뛰어들었다. “야이 씨발!! ”

재훈은 당황스러웠다. 방으로 뛰어들었으면 응당 방이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의 방은 온데간데 없었다. 삼십 초 전까지 분명 그곳에 있었던 그가 아끼는 침대도, 옷장도, 책상도 없었다. 그를 방으로 뛰어들게 한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거기에는 이끼가 잔뜩 낀 돌과 살짝 자라난 풀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만이 있을 뿐이었다.

불이 켜진 부엌에서 어두운 곳으로 갑작스레 들어왔기 때문인지,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당황한 재훈이 멈춰 서 있는 동안 차츰 어둠이 눈에 익었다. 저 멀리서는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로 보아, 이곳은 동굴 같았다. 재훈은 문득 낮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둠뿐이다. 재훈은 결국 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믿을만한 건 손에 들린 문구용 커터 칼 하나뿐이었다. 맨발에 축축한 습기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끼 탓인지 바닥은 푹신한 편이었다. 그래도 가끔 작은 돌들이 그의 발을 찔러 가뜩이나 심란한 그를 괴롭혔다. 빛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저 앞에 누군가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인가? 사람 이라기엔 눈이 너무 컸다. 그 모양새는 차라리 곤충의 그것 같았다. 그것도 좀 혐오스러운 파리의 눈처럼 튀어나와있었다. 등 뒤에는 뭔가 날개 같은 게 달려있었다. 워낙 크기가 커서 새의 날개 같았지만, 얼굴이 곤충모양이다 보니 날개 또한 곤충의 것처럼 보였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괴물 분장 이라기에는 그것은 너무 그럴 듯 했다. 좀 더 가까이 가보고 나서야, 그것이 파리-또는 파리와 인간이 혼합된 형태의 생물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참을 파리인간-재훈은 그것을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을 지켜보고 있는데 불쑥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카도르 인입니다.” 재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러나 거기엔 어둠뿐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다고 해서 언제나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알아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재훈은 그 목소리가 낮의 통화 목소리였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당신은 대체..” “쉿- 조용히.”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재훈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있으면 파나리스 인이 등장해 의식을 시작합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을 놀래 켜서는 안되거든요.”

재훈은 이 황당한 모든 일이 꿈이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눈을 뜨면 사라지는 허황된 꿈. 하지만 꿈 치고는 모든 일이 너무 생생했다. 두려움을 느낀 재훈은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몸을 돌리려 했으나 이번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이 궁금해했던 거잖아요. 이제 곧 시작됩니다.” 등 뒤의 목소리가 말을 마치자, 파리 인간 근처로 흰 점 같은 것들이 몰려드는 게 보였다. 흰 점은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재훈 손바닥 만한 크기의 생물체였다. 개구리처럼 커다란 검은 눈동자, 동그랗고 커다란 얼굴과 자그마한 몸집. 그리고 날개가 보였다. 언뜻 보니 머리 가운데에는 마치 잔디 같은 게 나 있었다. 머리카락 인 것 같았다. 그것들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목소리의 설명에 의하면, 그게 바로 파나리스 인이었다.

“파나리스 의식은 전 우주적으로 유명한 3만 가지의 의식 중 하나죠. 파나리스 인들이 사냥감을 제물 삼아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일종의 제사라고 보면 됩니다.” 사냥감이라.. 재훈은 저 조그마한 것들이 파리 인간을 사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 마리가 창을 들고 덤벼든다. 파리인간의 딱딱한 겉껍질을 향해 창을 찌른다. 창이 부러진다. 파리 인간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둘러 파나리스 인을 털어낸다. 두 마리? 열 마리? 백 마리는 되어야 파리 인간과 상대가 될 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거죠. 그들은 사냥감을 잡긴 하지만, 그것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냥’된 건 아니랍니다. 그들은 단지 사냥감을 ‘발견’할 뿐이거든요.” 발견한다고? “저 불쌍한 네카도르 인도 애초에 이 동굴에서 길을 잃어 죽은 거죠. 파나리스 인들은 몸도 마음도 그리 강한 편이 아니라, 살아있는 네카도르 인은 건들 생각도 하지 못한답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파나리스 인-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생명들-들이 파리인간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파나리스 인을 살펴보자, 그것들 중 몇몇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노이스.. 베라..” “체.. 데노…” 아까 전에 부엌에서 난 이상한 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만 들리던 때와는 달리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유백색의 피부가 빛을 받아 진주처럼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하자, 어릴 적 만화책에서 주로 등장하던 요정이 이 괴이한 생물체를 지칭했던 게 아닐까라고 재훈은 상상했다. 작은 것들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식은 언제 시작되는 거지. 재훈은 궁금했다. 파나리스 인들 중에는 우두머리로 보일만한 놈도, 무당이나 사제처럼 의식을 주관할 것처럼 생긴 놈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겨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이게 의식입니다.” 목소리가 말했다. 몇몇 놈은 아까부터 서로 마주보며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고, 어떤 녀석은 이쑤시개 크기의 창으로 파리 인간을 찔러보기도 했다. 물론 창은 파리인간의 각질을 뚫지 못했다. 대부분의 것들은 날개 짓을 하며 주위를 날아다녔는데 마치 음식 주위에 꼬인 파리를 보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하얗다는 점이 파리와는 좀 달랐지만 말이다.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의식이라고 해서 꼭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아닙니다. 파나리스 인들은 단지 사냥감을 자신들이 잡은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이런 형태로 그들의 무서움을 다른 생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스스로는 절대 이루어내지 못할 일이지만, 스스로 해낸 것처럼 가장하는 것. 그들은 이런 의식을 통해 용기를 얻는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제 이런 그들의 의식도 애초와는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에요. 이런 장면을 보고 다른 어떤 생물도 파나리스 인들이 강하다고 믿지는 않거든요. 심지어 그들 스스로도요. 단지 이제는 사냥감을 놓고 벌이는 이 의식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그들도 그저 그들의 조상들이 해오던 대로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통이라. 재훈은 생각했다. 이런 보잘것없는 조그만 것들도 전통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는 게 왠지 우스웠다. 이것들은 언제부터 존재해 왔을까. 우주가 생긴 이후부터? 인간보다도 먼저?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파나리스 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파리인간의 머리에 대고 뭔가 붉은 액체를 뿌려놓고 떠나기도 했다. 뭐지? 재훈이 생각하기 무섭게 목소리가 답했다. “분비물입니다. 쉽게 말해 소변이죠.” 쳇. 어딜 가나 성질 더러운 것들은 있다니까. 재훈은 작은 생명체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겼던 친근함이 한번에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파나리스 인들이 하나 둘 날라가, 파리인간의 시체만 남게 되자 목소리가 말했다. “자 이것으로, 파나리스 의식도 끝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안내자 무스코빈 이었습니다.” 끝이라는 말이 들려 재훈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집에 가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어둠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의 방이 보일 것 같았다. 재훈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침대도, 옷장도, TV도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공기는 눅눅했다. 재훈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그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전화 속 목소리를 크게 불러보기도 했으나, 무스코빈은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앞 쪽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이 난 재훈은 빛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미끄러웠지만, 그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탁탁탁탁-. 어둠 속에서 그의 발바닥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빛이 그의 온 몸을 감싸는 순간, 재훈은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달리는 속도가 결합되어 맹렬한 기세로 넘어지고 말았다. 재훈은 넘어지는 짧은 순간, 자신이 매우 어리석게 느껴졌다.

‘첨벙!’ 그가 넘어진 것은 물 위였다. 물이 있어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재훈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릎, 팔꿈치, 턱까지 온 몸의 구석구석이 화끈거렸다. 억울하다. 재훈은 어딘지도 모를 동굴 한 구석에서 격렬하게 넘어진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지금쯤이면 벌써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재훈은 자신이 여전히 방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가 넘어진 곳은 물 웅덩이였다. 문득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조그마한 틈새로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 위로 올라가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재훈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진흙탕이었다가 이제 잔잔해진 수면 위로 비친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물이 비춘 것은 20세 중반의 남자 인간, 재훈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단지 검은 눈 만이 흉측하게 튀어나온 파리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림은 제가 작업한것이고 글은 정진환씨가 써주신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글을 너무 잘써주셔서 그림이 글의 느낌을 따라가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2006.1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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